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십자군 전쟁 (문단 편집) === 십자군이 대부분 실패한 이유 ===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력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수복하며 주변에 십자군 국가까지 대거 설립했던 1차, 그리고 전투는 없었지만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양도받은 6차 정도만이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자심왕 리처드의 활약이 돋보였던 3차 원정은 결과적으로 목표를 이루지 못했으나 협상을 통해 기독교인의 예루살렘 순례를 인정받긴 했다.] 나머지 원정은 크고 작은 실패로 마무리 되었는데 여기에는 공통적인 이유가 몇 가지 존재한다. '''1. 보급 문제와 [[동로마 제국]]과의 불화''' 서유럽 지역에서 중동 예루살렘까지 보급로를 확보한다는 건 당시 경제, 기술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천에서 수만에 달하는 거대한 십자군은 필연적으로 동유럽 지역과 동로마 지역을 지나면서 숱한 약탈을 벌이고 다녔고, 이는 지역 민심이 이반되고 특히 동로마 궁정의 반감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1, 2, 3차 십자군은 보급 문제와 통행 문제로 헝가리 왕국 및 동로마 제국과 지속적으로 분쟁을 일으켰는데, 십자군의 통행을 보장해 줄 헝가리 왕국과 사이가 나빠지는 것도 문제지만 십자군의 현지 보급과 해상 이동 수단을 마련해줄 유일한 존재인 로마 제국과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니 원정이 제대로 이루어 질 수가 없다. 십자군 자체가 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요청으로 일어난 것이긴 하지만, 황제는 로마를 도울 지원 병력을 원했지 성전을 부르짖으며 몰려드는 통제불능 집단을 바란 게 아니었다. 게다가 1차 십자군이 출발하기 전에 은자 피에르라는 자가 수만 군중을 선동하여 성지로 진군해오면서 헝가리 지역을 약탈하고 파괴하다 분노한 헝가리군에 격퇴된 일로 인해서, 1차 십자군의 고드푸르아는 헝가리 왕국에 자기 동생을 인질로 보내고 나서야 통행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결국 이는 4차 십자군으로 가면 헝가리는 자다르를 십자군에 탈취당하고 동로마는 아예 콘스탄티노플을 함락당해 중앙 정부가 일시 붕괴되는 최악의 형태까지 가게 된다. [* 그래서인지 4차 십자군 이후로도 이 두 세력은 십자군을 불신하며 이들의 원정에 어떠한 협력도 하지 않았다.] 십자군은 아나톨리아 반도로 넘어가서도 지속적으로 사고를 일으켰다. 이슬람 세력권에 들었지만 이전까지 로마 영토였던 장소에는 여전히 기독교인들이 다수 거주했는데 십자군은 물자 보급과 전리품 획득을 이유로 약탈을 벌여, 겨우 수복한 영토의 민심과 경제력을 크게 망가뜨려놓은 것이다.[* 1차 십자군 당시, 십자군은 룸 술탄국의 수도인 니케아를 점령하고 서유럽 군대의 관례에 따라 약탈을 벌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니케아는 이전까지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로 룸 술탄국에 점령만 당했지 시민 대다수는 로마인들이었고 상실한 영토를 수복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킬 생각이었던 로마 제국은 십자군의 니케아 약탈을 결코 용인할 수 없었던 것. 황제는 니케아 수비대와 몰래 협상을 벌여 도시를 포기하는 대신 수비대의 목숨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니케아를 접수하고 십자군의 약탈을 막았다. 그런데 십자군은 이 조치에 크게 반발하며 불만을 토해냈다.] 결국 로마 제국와 십자군 사이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을 수 밖에 없었다. 2차 십자군 때는 독일왕 콘라트 3세가 병력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에 도달하였으나 황제 마누일 1세와의 충돌 끝에 제국의 교외 지역을 약탈, 이들의 행패에 질린 황제가 함대를 움직여 이들을 아나톨리아로 치워버리는 일도 있었으니 원정이 성공으로 끝나는게 이상한 지경이었다. '''2. 일원화되지 않은 지휘계통''' 1차 십자군은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선동으로 유럽국가의 내로라하는 유력 제후들이 참가했다.(어디까지나 왕이 아닌 대영주들) 총사령관으로 따지자면 구원 요청한 동로마의 알렉시오스 1세나 우르바노였겠지만 우르바노는 교황이기에 제외[* 다만 주교들을 파견하였다.] 위치상 동로마의 황제인 알렉시오스가 총사령관이었지만 십자군 원정 도중 여러 일[* 고드푸르아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강요했으며 이 일로 고드푸르아는 반항 알렉시오스가 보급을 끓자 고드푸르아는 심플하게 콘스탄티노플 근처를 약탈한다.][* 로마 제국이 니케아를 선점했을 당시에도, 십자군은 로마 제국의 보상이 약탈 전리품보다 약하고 이교도와 협상을 벌인데다가 십자군이 거의 함락해둔 도시를 강탈했다며 불만을 터트렸다.] 생겨지며 십자군과 관계가 조금씩 틀어졌다. 안티오키아 공략전에서는 레몽과 보에몽이 서로 대립했는데 레몽은 전략적으로 겨울이 오기전에 공략해야 한다는 속전속결을 주장했으나 안티오키아를 자신의 영지로 삼으려고 했던 보에몽으로선 레몽의 주장이 성공할땐 이후 안티오키아를 차지하기 힘들것 같아 반대했다. 실제로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을 때 십자군은 지쳐 있었고 이 탓에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도 성지를 단기간에 함락시킬수 없다 생각해서 보에몽의 주장에 동의하고 성을 포위하였으나 장기전에 들어서자 식량난에 시달리고 만다... 그나마 성공했던 1차에서도 이랬으니 다른 십자군들 역시 지도자들 끼리 싸우는 일이 많은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러한 악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사실 1160년대까지만 해도 십자군 국가들이 빠르든 느리든 결국에는 지중해 동부를 재패할 것으로 예견되었다. 십자군의 적들인 파티마조 이집트나 시리아 튀르크 군벌들도 비슷하거나 더 심각한 오합지졸이었기 때문이다. 1167년에는 [[아모리 1세]]가 카이로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칼리프에게서 막대한 액수의 조공을 뜯어냈으며 사실상 이집트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불과 10년도 안 되는 사이, 무명에 가까웠던 젊은 쿠르드인 전사 [[살라딘]]이 삼촌인 [[시르쿠]], 아모리 1세, [[누르 앗 딘]] 등의 거물들이 연달아 사망하는 틈을 노려 무서운 속도로 세력을 확장하더니 결국 십자군 국가들에게는 최대의 악몽인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합[* 토양염화와 유목세력의 확장으로 쇠퇴하고 있는 메소포타미아를 대신해 이슬람 세계 최대의 부국이 된 이집트와, 거의 무한에 가까운 초원 말박이 용병 인력시장인 시리아의 결합]까지 얼떨결에 달성해버렸다. 낙관적인 전망에 안심하고 있었던 기독교 세력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물론 살라딘이 나타났다고 바로 통합된 건 아니고 살라딘 이전에도 [[이마드 앗 딘 장기|장기]]와 [[누르 앗 딘]]이 빌드업을 착실히 쌓아두고 있었다. 여러 우연과 필연이 겹친 결과 살라딘이 통합을 이뤄낼 수 있었고 결국 십자군은 성지를 빼앗기고 이후로도 성지를 찾지 못하다가 1291년이 되면 완전히 레반트에서 축출된다[* 물론 십자군을 완전히 축출한 건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가 아닌 맘루크 왕조였다]. 그 이후 십자군 잔존세력은 키프로스 왕국으로 이어지며 구호기사단은 키프로스 왕국 몰락 이후에도 로도스 섬과 몰타 섬으로 이동하며 이슬람 세력에 지속적으로 항거했다.성전기사단은 아크레 함락 이후 얼마 안가 해산되며 튜튼 기사단은 아예 북유럽 발트 지역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북방 십자군의 주축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